영화 속 경제학

당신이 믿고 있는 그 정보, 진실입니까?
영화 <박열>

분노와 절망의 시대, 박열이란 범상치 않은 독립투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가 익히 알던 독립투사와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열 영화를 통해 사회, 경제, 정치를 쥐고 흔드는 ‘인포데믹스’의 진실을 마주합니다.

경향신문 박병률 차장
모든 권력과 권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 ‘박열’
영화를 통해 미처 몰랐던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는 것은 반갑다. 이준익 감독이 ‘사도(사도세자)’, ‘동주(윤동주)’에 이어 또 한 명의 인물을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일제강점기 부당함을 온몸으로 맞선 뜨거운 독립투사 박열이다. 박열은 22년 2개월 투옥된 최장기 독립투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낯익지 않다. 납북인사여서 오랫동안 남쪽의 역사에서 지워졌던 탓도 있지만 우리가 알던 정형화된 독립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도 이유다. 그는 모든 권력과 권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였다. 광복과 6·25전쟁, 산업화시대를 지나면서 냉전과 국가주의에 맞닥뜨려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납북된 아나키스트는 주목받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내가 목욕을 할 때/나도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의 시 ‘개새끼’는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우리 동거합시다. 나도 아나키스트입니다.” 그녀는 대뜸 박열과의 동거를 제안한다. 그리고 동거서약서를 쓴다.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공동생활을 그만둔다’는 조건이다. 박열은 도쿄 중심가에서 최초의 조선인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와 항일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한다. 그는 일왕이라는 절대권력자가 붕괴되어야 조선민중은 독립을, 일본민중은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박열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관동대지진에 숨겨진 음모 ‘대형 조작사건’
1923년 9월. 관동에서 일어난 진도 7.9의 대지진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집과 가족을 잃은 일본인들은 무력한 일제에 분노했다. 폭동의 조짐이 일자 일제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민간인으로 조직된 자경단과 군경은 조선인 사냥에 나선다. 이때 목숨을 잃은 조선인이 6,000여 명. 체포된 조선인이 또 6,000여 명이나 됐다. 훗날 관동대학살로 불리는 사건이다. 일제는 이를 감추기 위해 대형 조작사건이 필요했다. 그 희생물이 ‘조선인에게는 영웅, 일본인에게는 원수’인 박열이었다. 박열은 일본왕자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한 ‘대역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돼 아내 후미코와 함께 사형을 언도받는다.
관동대지진으로 국가운영 능력을 의심받는 일제가 낸 꾀는 유언비어였다. 증거도 없고, 발설지도 모르지만 유언비어는 사람의 입에서 입을 타고 불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 일본 군경과 자경단은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학살했다. 이들은 ‘십오엔 오십전(十五円 五十錢)’을 일본어로 말하게 한 뒤 발음이 이상하다 싶으면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광기의 시대, 박열은 제 발로 감옥에 걸어 들어간다. 차라리 투옥당하는 게 안전했다. 일본인들은 왜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에 쉽게 현혹됐을까. 위기상황이 닥치면 위기 자체도 무섭지만 몰라서 느끼는 공포감이 더 크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유언비어는 집과 가족을 잃은 일본인들에게 극심한 공포를 유발시켰다. 공포감은 괴담을 타고 손쉽게 확산된다.
인포데믹스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나 루머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현상을 인포데믹스(Infodemics)라고 한다. 인포데믹스는 정보(information)와 전염병(epidemics)의 합성어다. 인포데믹스로 인해 공포감이 극대화된 사람들을 진정시키기는 쉽지 않다. 사회적 신뢰는 사라지고 공권력에 대한 믿음도 상실된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다 보면 경제나 정치, 안보는 엉망이된다. 인포데믹스를 정보전염병 혹은 21세기의 흑사병이라 부르는 이유다. 인터넷 사회에서는 인포데믹스의 전파 속도가 더 빠르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를 통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간다. 스마트폰의 라인과 카카오톡의 위력도 대단하다.
인포데믹스는 2003년 5월 미국 컨설팅 업체인 인털리브리지의 데이비드 로스코프 회장이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7년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다. 금융위기 당시 확인되지 않은 루머와 음모론이 SNS를 타고 삽시간에 확산됐다. 부실 파생상품을 누가 얼마나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경색을 가져왔다. 다보스포럼은 금융시장의 인포데믹스를 경고했다. 인포데믹스가 무서운 것은 금융시스템을 일순간에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은행이 약간의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그 은행은 곧 망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면 예금자들이 은행으로 몰려들며 뱅크런이 일어난다.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 예금자들에게 예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은행은 파산이다. 국제경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가 위험하다더라, 스페인이 위험하다더라와 같은 루머에 해당국의 환율은 치솟고 주가는 폭락할 수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도 이런 식으로 투기자본에 당했다.
긍정적 정보가 제공하는 기회 ‘버즈 마케팅’
인포데믹스는 정보를 통제해 공공조직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때 잘 나타난다. 믿을 만한 정보가 없으니 불안하고, 헛된 루머에 쉽게 현혹된다. 2005년 메르스 사태도 그랬다. 정부가 정보를 통제하며 독점하자 온갖 루머들이 온라인 세상을 가득 메웠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정보는 확실히 강력하다. 부정적 정보의 유통이 빚는 사회적 부작용이 인포데믹스라면 긍정적 정보가 제공하는 기회도 있다.

이른바 버즈 마케팅(buzz marketing). 버즈란 꿀벌이 윙윙거리는 소리다. 꿀벌이 윙윙 대는 것처럼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입소문을 내고, 이를 이용해 마케팅을 펴는 것을 버즈마케팅이라고 한다. 비슷한 의미로 입소문 마케팅, 구전 마케팅이라는 용어도 있다. 파워블로거를 이용한 마케팅은 대표적인 버즈마케팅이다. 이들이 제공하는 정보는 TV광고나 신문광고에 비해 적은 돈을 들이고도 더 깊은 인상을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관광객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린 감동적인 경험담은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는 데 때로 대중광고보다 효과적이다. 중국의 파워블로거를 초정해 K-POP이나 뷰티, 여행홍보를 펴는 것을 왕홍 마케팅이라고 한다. 왕홍은 중국의 파워블로거를 의미한다. 이들은 몇 백만 명의 소비자를 몰고 다닌다.
묻으려 할수록 진실은 드러난다
내무대신 미즈노는 내각회의에서 “이 난리통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다닌다고 합니다.”라며 총리에게 보고한다. 총리가 “누가 그래?”라고 마뜩찮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심드렁하게 답한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왕궁 앞에 몰려있는 성난 군중을 뭘로 달랠껍니까? 이 방법이 아니면 우리가 표적이 됩니다.”
일제는 인포데믹스를 이용해 여론을 호도하고 진실을 덮으려 했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법정에선 박열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를 까발린다. “너희들은 3.1운동처럼 조선인학살을 묻으려고 한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묻으려고 발악할수록 드러나는 것이 자연의 순리요. 역사의 흐름이다.” 광기의 시대가 지나면 언제고 진실은 드러난다. 나찌도 그랬고, 일제도 그랬다. 그러나 인포데믹스가 남길 상처는 깊고 아프다.
특히 신뢰로 쌓아올린 경제시스템이라면 더욱 그렇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인포데믹스를 경계해야하는 이유다.
장르 드라마
개봉 2017.06.28
감독 이준익
출연 이제훈(박열), 최희서(후미코), 김인우(미즈노)
영화 ‘박열’을 재밌게 봤다면 이곳을 추천합니다!
박열 의사의 고향인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에는 그의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박열 의사의 옥중생활과 법정생활이 복원돼 있다. 특히 박열 의사가 사모팔관을 쓰고 일본제국을 질타했던 당시 모습이 생생히 재현돼 있다.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며 음미해본다면 느낌이 새로울 것이다. 이곳에는 박열의사의 생가, 아내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묘가 있다. 박열 의사 생가지는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에서 재평가돼 ‘일본을 움직은 10대 여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때문에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도 많다고 한다. 영화 속 박열은 후미코에게 결혼신고를 제의하면서 “나의 형이 우리의 유골을 수습해서 나의 고향 땅에 합장해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박열 의사는 6.25전쟁 때 납북돼 북에서 타계해 평양에 묻혔다. 그의 약속은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하절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요일을 제외한 공휴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단 삼일절, 현충일, 광복절은 문을 연다.

- 박열의사 기념관 / 문의전화 : 054-572-3396~7 (관람무료)
웹진구독신청